Who am I -church cubic
Who am I ?--à I am who I am
사람들이 가진 질문 중에 나는 누구인가를 가장 궁금해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영어의 질문 who am I ? 질문을 거꾸로 답하신 분이 계신다.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훈련을 받고 있을 때 떨기나무에 불로 나타나시면서 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다른 사람한테 하나님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리 까 질문할 때 하신 말씀이 I am who I am이다. 하나님은 모세한테 스스로 계신분이라는 이름으로 이스라엘 사람한테 말하라는 것이다. 이 말은 히브리언어로 야훼라고 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이 누구냐 고 질문하면 이 답을 말하라고 하시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너무 두렵고 영광스러워 쉽사리 말도 하지 않았다. 분명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궁금해하면 이야기하라고 하였다. 이스라엘 사람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을 때도 하나님을 이렇게 말하라고 직접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이 스스로 있을 수 없고 스스로 존재할 수도 없다. 사람은 피조물이다. 사람을 만든 창조주만이 스스로 존재한다. 그 사람을 만든 스스로 존재하는 분인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다. 우린 스스로 존재하는 분이 있는 줄을 모르고 내가 누구인지 만을 궁금해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가를 궁금해하는 것은 나를 창조한 사람이 누구 인가의 질문과 연결된다. 결국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라는 질문이 내가 누구인가를 아는 질문의 원인이 된다. 내가 피조물이라면 나를 창조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내가 누구인가를 알게 된다. 이런 질문이 바로 영혼의 질문이며 어쩌면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창조주 하나님은 누구인가? 내가 창조주 하나님을 찾는 다는 것은 나의 실상을 찾는 것과 같을 수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영원하시며 무소 부재하시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여 만이 우리 같은 피조물을 만들 수가 있다. 이런 영원성을 가지신 분이 피조물인 사람이 죽게 만들어 영원하지 못하게 만들었을 까? 우리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실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절대공의를 가지신 하나님이 작은 죄도 심판을 받게 하신다. 거룩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알면 피조물인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게 된다. 그런데 우리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성경에 쓰여 있지만 실상 사람들은 그런 실상을 못 느낄 수 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의 속성이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내가 피조물이며 죄인이라는 진실이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고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질문을 할 때 이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증명된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알도록 세상에 많은 증거들을 두셨다. 이미 하나님은 내가 누구인지를 물어보는 사람들한테 답을 이야기했다. 어쩌면 내가 누구인지 물어보는 모든 사람한테 모세를 통해 그 존재를 알리신 것도 여기에 포함된다. 모세에게 who am I 로 질문하는 모든 사람한테 그 존재 질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분(I am who I am)으로 답을 주시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질문할 때 답하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방법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알면 그 답이 나온다. 내가 부모님을 선택 못하고 내가 나의 태어날 지역과 환경을 선택 못하는 것은 결국 내가 피조물이라는 증거이다. 내가 피조물이면 결국 나를 나은 부모님도 피조물이며 부모님의 부모님도 피조물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상위로 올라가면 피조물의 끝에 창조주가 피조물을 만들을 수밖에 없게 된다. 모든 존재하는 단계들에 있어서 최상위의 존재 (the Maximum)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모든 지성적 존재들에게 지성을 부여한 최초의 완전한 지성 (the First Intelligence)적인 존재 창조주가 있을 밖에 없다.[1]
또한 창조주 하나님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이미 세상 자연과 우주 만물에 계시로 표현하시었다. 그 계시가 무엇인지 먼저 알아야 그 창조주가 누구인가를 알 수 있다. 모든 피조물에는 창조주의 싸인 같은 창조주의 숨결이 있다. 그것은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자연속에서 그 창조주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너무나 많다. 바다에서 산에서 들짐승에서 창조주가 있음을 우린 느낀다. 이것은 일반계시이다.
그런데 오직 하나님이 사람에게 영적인 연결로 특별한 계시를 열어줄 떄가 있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 사람에게 특별계시인 연결고리를 만들어 주었다. 바로 예수님 이시다. 하나님이시며 인간이신 예수님이 이세상에서 오시었다. 창조주이신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사람들한테 답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피조물의 존재를 십자가의 보혈과 부활로 새로운 피조물 존재 새사람으로 바꾸시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내가 가진 죄성의 실상을 알게 되면서 내가 바라는 실상으로 바뀌는 모든 것이 바로 복음이다. 복음은 사람에게 신성 성령 하나님이 임재를 통해 들어가 내가 누구인가를 질문하는 사람에게 너는 새로운 존재이며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게 하신다. 진정 내가 바라는 실상 누구인가를 믿음을 통해 알게 하신다. 예수님이 주신 복음은 하늘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이 땅에 인간이신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오셔서 스스로 존재하는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며 피조물인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특별하게 알게 하시었다.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성전을 삼으시고 하나님의 나라 제사장으로 살게 하시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아무 차별없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영적 제사를 즉 영적예배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되게 하시었다.[2] 이 모든 것을 기록한 것이 바로 성경이다. 성경 말씀을 듣고 읽으며 상고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임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믿음으로 임한다. 이렇게 특별 계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 가능하며 결코 사람의 공로로 이루지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믿음의 시작은 내가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라는 작은 질문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를 모르면 내가 바라는 실상도 모른다. 어떤 사람들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질문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 바라는 실상이 응답으로 올 때 보이지 않는 증거들이 성경을 통해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 예수가 죽은 후에 전 기독교 커뮤니티는 그 때까지 상상할 수 없었던 완전히 새로운 믿음을 갑자기 채택하게 되었다. 그들은 예수로부터 미래의 부활을 이미 시작됨을 믿었다. 예수가 벽을 관통할 수 있는 동시에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변화된 육신을 가졌다고 믿었다.[3] 그 부활하신 예수님이 생명으로 신성과 인성이 연합된 새로운 존재가 우리가 바라는 실상이다. 예수님은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고 복되다고 하시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사소한 질문과 궁금증으로 바라는 것의 실상을 찾을 때 보이지 않는 증거들인 믿음으로 시작된다. 결국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어떻게 아는 가에 증거는 내 안에 내가 누구인가의 질문이
[1] 이퀴낙스 저, 신학대전( )
[2] 정성욱교수 저, 한국교회 이렇게 변해야 산다( 서울,큐리오스북스)67
[3] 티머시 켈시저 , 권기대 옮김 살아 있는신( 서울, 베가 북스) 297